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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 28화)한국 안의 미국 땅, 미군 기지가 낳은 문화
2018년 11월 2일, 대한민국 국민에게 오랫동안 금지된 땅이었던 대한민국 안의 미국 땅, 용산 미기지가 드디어 개방되었다. ‘용산기지 버스투어’가 시작된 것이다.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했던 12월 투어는 참가 신청이 몇 분 만에 마감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고 시민들이 선착순 방식에 항의하자 2019년 투어(4~6월)에서는 참가자를 추첨을 통해 선정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추첨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용산기지 주변지역 워킹투어’(녹사평, 용리단 산책)를 통해 미군기지 주변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엿볼 수도 있다.
 
지난해 11월2일 서울 용산구 용산미군기지에서 열린 '용산기지 첫 버스투어'. 참석자들이 일제시대 일본군 감옥인 위수감옥 앞에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역사 속 타자들의 땅
지난해 용산 미군기지의 개방이 114년만이라고 언론에 회자된 이유는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일본이 한일의정서에 의거해 용산 땅 300만평을 포함하는 총 975만평의 토지 수용을 조선에 통고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한국주차군(1904∼1910), 조선주차군(1910∼1918), 조선군(1918∼1945.2), 제17방면군(1945.2∼1945.8)으로 개칭되어가면서 군대조직을 정비했다. 1905년 일제와 조선 정부 사이에 군용지 수용 협상이 이루어지고 1906년부터 1913년까지 용산기지가 건설된다. 필동군영(현 남산골 한옥마을)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는 1908년 용산으로 이전했고 이후 부대들도 집결해 118만평의 드넓은 땅이 일본의 군사기지로 사용되었다(참고로, 윤중로 내부 기준 여의도의 크기가 2.9㎢, 약 88만 평이다).
 
사실, 그 이전의 역사에서도 이미 용산은 외세 침탈의 대표적 공간이었다. 도성과 한강에 가까운 군사적 요충지여서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후방병참기지가 건설된 곳이고 임오군란 때는 청나라 군대가, 갑신정변과 청일전쟁 승리 이후에는 일본군이 주둔했기 때문이다. 러일전쟁 이후 군사시설과 철도 등 교통시설을 건설해 용산역 일대를 개발한 일본은 본래의 용산(효창공원과 원효로 서쪽 일대)과 구분해 ‘신용산’이라 명명했다.
 
한편, 1945년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이 땅을 거의 고스란히 물려받은 미군은 1948년 철수했다가 한국전쟁 이후 용산기지에 정착하게 된다. 2018년 주한미군사령부가 평택기지로 이전했지만 모든 부대의 이전이 완료된 것은 아니어서 용산기지는 아직까지 미군의 관리 하에 있다. 평택기지는 총 444만평 규모라니 용산기지보다 몇 배로 커진 셈이다.
 
용산미군기지 뒤편으로 보이는 용산의 초고층 빌딩들 모습. 사진/뉴시스
 
서울 용산 미군기지, 그 흔적
해외파병 미군부대에 붙어 있는 캠프 이름은 보통 전사자의 이름을 붙인다. 예를 들어, 용산기지 메인포스트 북쪽의 ‘캠프 코이너’는 1953년에 전사한 랜달 코이너 소위를 기린 것인데, 이 캠프 코이너는 조선의 왕이 기우제를 지내던 남단(南壇)이 있던 곳이고 임오군란 당시 청군의 병영이 있었던 곳이자 이후에는 일본군 야전 포병부대가 주둔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캠프 킴’이라 이름 붙여진 곳이 있다. 용산기지 메인포스트의 서쪽 편에 위치한 이곳은 일제강점기 당시 육군 창고였고 미군 주둔 시절에는 주한미군 특수작전사령부와 미군의 복지기관인 연합서비스조직(United Service Organizations, 일명 ‘미국위문협회’로 불린 USO) 등이 있었다. 미군이 한국 성씨 ‘김(Kim)’을 따서 캠프 킴이라 명명한 이유는 여기에 한국인노무단(Korean Service Corp)이 위치해 미군보다 한국인을 더 많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캠프 킴 부지의 이 USO 건물에는 현재 ‘용산공원 갤러리’가 만들어져 시민들에게 용산기지의 역사를 알리고 있다. 

주한 미8군이나
나토 미군이나
그들의 주둔 부대 이름
캠프 매카서도
< … >
캠프 리지웨이도 아니다

그것 하나는 부대의 두메 출신 한 사병 성 따라
캠프 해프너
캠프 맥과이어 어쩌구

한국 서울 용산과
한국 여기저기
미군 캠프가 그렇게 민주적으로 그렇게 위압적으로 주둔하고 있다
그 미군부대
한국의 수돗물 사절
설악산의 물도 사절

일본에서 실어오거나
한국 고지대 지하수 뽑아
다시 철저하게 정화시켜 조심스레 마셨다
미 극동공병단 화학실험실 검사 거친 물조차
매월 검사필 12만통 한국 상수도 물조차
그냥 마당에 뿌리거나
이것저것 잡동사니 씻는 데 썼다

1970년대 중반 이에 질세라 8군한테 뒤질세라
광천수 마시는 서울사람
어느새 1천여 가구
로열맨션
빌라맨션
< … >

그들 중에 초정약수 가족회가 있다
그들은 일요일마다
관광버스를 대절
충북 초정에 가서
물을 떠온다
이에 질세라 서울사람 뒤질세라
부산 상류계층 40명쯤
물을 떠간다
(‘초정약수 가족회’, 15권)
 
전쟁 후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 캠프 킴에서 일하던 한국인노무단의 일은 미군기지 바깥의 한국인들에게 선망의 직업이었을 수 있다. 집, 학교, 병원, 식당, 쇼핑센터, 도서관, 영화관, 체육관 등 모든 필수·편의시설을 망라하고 호텔과 넓은 골프장까지 갖춘 용산 미군기지는 하나의 독립된 도시로 완전히 다른 세계였던 것이다. 그곳은 ‘부대찌개’의 출현부터 주한미군방송(AFKN)을 통한 미국문화의 도입까지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키거나 전파시키는 근거지였다. 또한, 미군들을 위한 세탁소와 양복점이 생겨나고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랑거리가 형성되는 등, 기지 주변지역의 한국인들에게 생계 수단을 제공하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1950년대 주한미군 사령부 대상 세탁소 모습을 담은 '용산공원 갤러리' 안 사진 작품. 사진/필자 제공
 
부산기지 캠프 하야리아, 경마장에서 시민공원에 이르기까지
미군의 부산기지사령부 캠프 하야리아는 1950년에 설치되고 2006년에 폐쇄됐다. 2010년 초 캠프 하야리아의 부지를 반환받은 부산시는 2011년 공사를 시작해 2014년 부산시민공원을 개장했다. 여기에는 1995년 ‘우리 땅 하야리아 등 되찾기 시민대책위원회’의 결성을 시작으로 꾸준히 반환 요구를 해온 부산 시민들의 노력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캠프 하야리아 부지는 1927년 일제가 부산경마구락부를 설립하고 1930년에 서면경마장으로 개장했던 곳이다. 1937년 중일전쟁 당시에는 이 경마장에 일본군 기마부대가 설치되었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말에는 일본군 제72병참경비대가 설치되었다. 이곳은 또한, 1942년 일제가 임시군속훈련소를 설치해 동남아 각지의 연합군 포로들을 관리할 포로감시원을 양성한 곳으로, 강제로 징발되어 훈련을 받은 조선의 젊은이들을 머나먼 타국에서 ‘전범’으로 만들어버린 애환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들은 ‘포로감시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일본군 신병과 똑같은 군사훈련을 받았다.
 
캠프 하야리아의 장교클럽 건물은 현재 부산시민공원 내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역사관의 전시 내용에 따르면, 캠프의 이름 ‘하야리아(Hialeah, 하이얼리어)’는 미국 플로리다주의 경마장 하야리아에서 따왔다는 설과 부산 미군기지 초대사령관의 고향인 플로리다주 하야리아시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다. ‘하야리아’는 북미 원주민들의 언어로 ‘아름다운 대초원’ 또는 ‘고지대 프레리(대초원)’라는 뜻이라고 한다.
 
부산 하야리아기지의 변천 모습을 담은 부산시민공원 역사관 내 사진. 왼쪽은 1950년대, 오른쪽은 1980년대. 사진/필자 제공
 
임시수도 부산 하얄리아부대 언저리
부대는 화려하고
부대 밖은 황량했다

그 부대 부근에 기웃거려야
재수 좋은 꿀꿀이죽을 얻어먹었다
쓰레기 버리러 나가는 차 꽁무니에서
빵찌꺼기 레이션 찌꺼기
한 바가지 얻어걸렸다

그 부대 건너 피난민수용소
천막에 구멍나
겨울비 오면 빗물이 샜다
그 천막 안의 18세 처녀와
스무살쯤 차이의 늙수그레 야전잠바가 만났다
< … >

지금 처녀는 속아넘어가고 있고
야전잠바는
미군부대에서 나온 세숫비누 다이알로
처녀의 환심을 사고 있었다
< … >
(‘연애’, 16권)
 
미군부대 하야리아의 피엑스에서 빼돌려진 온갖 물품들이 국제시장, 깡통시장의 주요 품목이던 시절이 있었다. 비누같은 생필품과 전투식량인 C-레이션부터 담배, 옷, 과일, 커피, 라이터, 라디오, 사진기, 심지어 전축도 흘러나왔고, 시장뿐 아니라 노점상들도 부대 주변과 시내 곳곳에서 미군부대에서 나온 물품들을 팔았다. 한국전쟁 당시, 부대 안에 세탁소가 생기기 전에는 마을사람들이 옷 한 벌에 100원(당시 쌀 한 되 가격)씩 받고 미군들의 옷을 받아와 빨래터에서 빨았다고 한다.
 
하야리아 역시 용산기지처럼 각종 스포츠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야구를 즐기는 미군들 덕분에 인근마을 어린이들도 야구를 익히고 함께 친선경기도 했다니 흥미롭다. 역사관 내 전시물들 중 어린이들과 관련해 특히 눈길을 잡아끈 것이 있다. 전쟁 초기 전기 공급이 되지 않는 텐트에서 야영을 하는 미군들에게 어린이들이 “해피 뉴욕? 유 바이 램프 원 달라?”라고 외치며 램프를 1달러에 팔았는데, ‘해피 뉴욕’은 ‘해피 뉴 이어’를 잘못 알아듣고 말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미소를 짓기에는 가슴이 싸하게 아려오는 슬픔과 우리 역사의 비애가 상기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아이들이, 전쟁을 겪고 전후의 가난을 겪은 한때 어린이었던 우리의 윗세대들이, 한반도 여기저기에서 단단하게 살아남았다.
 
미군에게 1달러짜리 램프를 파는 어린이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그 이야기를 전하는 부산시민공원 역사관 전시물. 사진/필자 제공
 
군산항
미 육군 제21항만사령부 정문 입구
그 높은 철조망 아래
세탁소 바라크 들 있고
구두 닦는 움막 하나 있다

헬로우 그리고 댕큐밖에 다른 말 쓸데 없다
한국말 쓸 곳 없다

열두살짜리 쇼리 팍
하루 미군 군화 2백 켤레 닦는다

받은 잔돈
목에 건 주머니에 차곡차곡 넣는다
두 손등 
구두약에 광난다

그까짓 점심 건너뛴다
< … >

이 세상 무서울 것 하나도 없다 아무 걱정도 없다
오후 여섯시 구두닦이 움막 나설 때에야
녀석이 절름발이인 것을 안다
(‘쇼리 팍’,19권)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